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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윤명의 탐구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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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임해영
  • 등록일 : 2015-06-05
  • 조회수 : 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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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윤명의 탐구생활 1 - 어사 박문수


    주관적이기 짝이 없고 밑도 끝도 없는, 그리고 정답도 오답도 없는 질문 하나만 해 보자.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왜 창조했을까? 당연히 답도 주관적이다.

    ' 만들고 보시니 좋았다 ' 라는 창세기의 대목에서 흔히들 '보시니 좋았다'. 즉 아름다움을 말하곤 하던데, 사실 이 아름다움은 여기서는 어디까지나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신께서는 원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분이라 스스로 만족하기 위해 아름답게 만들었다는 거지, 그것이 만들고 보니 우연히도 아름다왔기에 희희낙락하신 것이 아니란 거다.

    즉. 신께서는 순전히 '스스로 좋아하기 위해서'. 즉 즐겁기 위해서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셨다.



    어사 박문수 (2005.10.25) : 김윤명



    나는 이 그림을 딱 보고 나니 가슴이 찡하던데, 당신들의 가슴은 괜찮은가?

    이렇게 서양화에서나 볼 수 있는 입체적인 구도를 흡수하고 완벽하게 소화해 낸 현대 동양화는 무시무시한 파괴력으로 인간의 감성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게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도 당연하다. 피레네 산맥의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이 모여 그리스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다른 작가들이 그린 성자들의 삽화를 필사, 모사에 카피 떡칠을 할 때, 지구의 반대편에 살던 사람들. 즉 우리들은 한 차원 위에서 놀고 있었다.

    산천은 유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다는 쓸쓸한 심경을 토로한 야은 길재부터 백두산 돌멩이들은 죄다 칼을 갈아 없애버리겠다는 남이 장군의 격정까지, 우리네는 자아를 드러내는 것이 바로 생활 그 자체이자 부와 명예를 얻는 지름길이었다.

    자아를 드러내기 위한 고련과 노력은 옛날부터 동양 쪽이 서양보다 두어 수 위였던 거다.

    이런 동양의 그림들 가운데 사실 내가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 작품은 겸재 정선의 작품도 아니고, 안견의 몽유도원도도 아니다.

    그 시기를 인상깊게 드러내어 그 시기의 사람들이나 우리나 결국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는 안도감을 주는 작품.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월은 흘러, 우리와 한치도 다를게 없었던 그때의 그 사람들은 이미 가고 없지만 우리는 남아있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의 후세또한 우리가 가기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무서운 불변의 연속성마저 보여주는 작품.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양 특유의 깊숙한 묵선으로 지극히 가볍고도 발랄한 터치를 써서 그 무겁고도 장중한 것에 대해 풍자를 가해 잔잔한 소시민적 쾌감을 던져주는 작품.

    한 마디로 삶의 즐거움이 넘치는 작품. 바로 신윤복의 풍속화 시리즈인 것이다.

    *

    이런 식의 단단한 사상적/기본적 토대 위에 서양의 작법을 받아들이고 완전하게 소화해 낸 동양화는 그 순간 인간의 감성과 본질을 터치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를 얻는데 성공했다.

    그게 어떤 무기냐고? 아무리 못난이라도 상대를 껌뻑 속여넘길 수 있는 조명빨, 그리고 누구나 얼짱이 될 수 있는 구도 연출. 즉 각도빨을 장착했다는 거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점도 나타났다.

    다른 모든 것도 마찬가지지만, 무릇 장점만 받아들이고 단점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작심은 쉽게 말해 욕심장이의 심보나 다를 바 없고, 게다가 가능하지도 않다. 동양의 예술가들은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서구식 구도와 조명을 받아들이면서 그 뒤에 숨겨져 있는 서구식 문제거리들마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고스란히 흡수했다. 서양의 예술가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돌려왔던 자아 파괴와 작가적 고뇌의 쳇바퀴. 이미 우리는 별 고민없이 신경쓰지도 않고 숨쉬듯 자연스레 이루던 것들을 덩달아 고민하며 돌려대기 시작한 거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들다 쓸쓸함을 느끼면 그저 한 수의 시조로서 어렵지 않게 자신을 표현해 왔던 우리들. 속된 말로 '빡이 돌면' 이 몸이 죽고 죽어 골백번 고쳐 죽어도 너와는 안 놀겠다고 호령하던 우리네들의, 이 너무나 자연스럽기에 차라리 생활의 일부분이었던 자아 노출은 어느새 '예술가란 고뇌해야 하는 존재'라는 어딘가 멋지고 폼나는 명제가 유행처럼 퍼지면서 사라져 갔고, 그와 함께 우리의 그림들에서도 한 가지 중요한 요소가 마치 허깨비처럼 증발해 갔다.

    바로 '즐거움'이 사라져 간 거다.
     

    *
     

    어사 박문수의 그림은 절절하다. 고적한 산길을 방자 한 명 데리고 어디론가 걸어가는 정처없는 낙척서생. 화면은 아름답기 짝이 없고 분위기는 유연하기 이를데 없지만 어딘지 아름다운 만큼 공허하고 부드러운 만큼 고적하다. 탐관오리의 비행을 탐문하는 은밀함의 전개도, 암행어사의 출도로 극을 이룰 수 있는 반전의 카타르시스도, 살찐 원님을 봉고파직시키는 권선징악의 막강 포스도 그림에서는 전혀 표현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저 정적과 적막만이 그의 앞을 드리우는데, 정작 말동무가 되어주어야 할 방자 녀석은 삼보 뒤에서 천천히 따르고 있다. 암행어사, 즉 작가의 분신은 고독하기 짝이 없다. 천하디 천한 방자마저 외면한 비참한 낙척서생, 길벗이 되어줄 수 있는 것은 오른편에 솟구쳐 오른 앙상한 나무와 힘이 딸려 속시원히 산을 밝히지 못하는 만월 뿐이니 이 일을 가련하여 어이할꼬.

    사위가 어찌나 고적하고 고독하던지, 화면 왼편 아래부분의 어사 박문수라는 글귀가 없었다면 난 아마 이게 산천초목을 떨어울리는 박문수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게 나만 그럴까? 불쌍한 박문수 본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가 이 고생을 하려고 죽어라 공부해서 장원급제를 했던가.
    다 집어치우고 진짜 낙향이나 할까.
    아서라, 불알친구 이몽룡이는 성춘향이라도 있었지 난 그나마도 없지 않은가.

    그러니 달빛을 밟으며 그는 끊임없이 자문한다.

    ' 왜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거냐구! '

    박문수의 표정은 아마 어두울 거다. 박문수만 그런게 아니라, 작가도 어둡고 쓸쓸할 거다. 즐거울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즐겁지 못했다면, 대단히 불행한 사실이지만 인간은 즐거움을 느끼는 방법을 잊게 된다. 정확히는 즐거움이 없는 상황에 적응해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보통 사람이라면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살고 말텐데, 작가는 예술가다.
    끊임없이 자아를 파괴하고 재조립하면서, 손바닥 위의 퍼즐조각을 보듯 자신을 관찰하는 사람이다.
    십중팔구 본인도 역시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왜 나는(내 그림은) 즐거움이 없지?

    그래서 한층 더 심도깊게 자신을 파보려고 한다. 시뻘건 속살이 나올 때까지 파기 위해 스스로를 고문하다 보면 뭔가 달라지기를 기대하면서. 하지만 점점 더 어두워 지기만 할 뿐이다. 그건 절대적으로 당연하다. 고문당하는 사람이 즐거워서 웃는 경우는 지속적인 고문으로 인해 실성했을 때 뿐이 아니던가.

    그림을 잘 그리던 못 그리던, 즐거운 상태에서 그리는 그림은 자연스레 아름다와 지기 마련이다.
    초등학생이 개근상이라도 타 온 다음 그리는 그림일기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초등학생은 스스로의 즐거운 기분을 드러내기 위해 아름다움을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작가적 고뇌는 기껏해야 크레파스가 모자란다거나, 그림 그리는데 자꾸 똥침놓는 형에 대한 불만 정도에 머물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림을 그려야만 하는 전문 작가라면 경우가 좀 다르다.
    그는 좋든 싫든 그려야 한다. 이미 그것은 생업이 되었지만, 비단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더라도 창작의 단맛을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절대 그 희열을 잊지 못한다. 그 희열은 마약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다.

    무언가를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냈고, 앞으로도 만들 수 있다는 그 창작의 즐거움은 본디 인간의 영역이 아닌 신의 영역에 속하는 것. 그래서 예술가들은 즐거움을 잃었을 지라도, 아무리 자신의 허무가 몸서리쳐 지게 싫다 해도, 사실상 선택권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할 수 없는 사람 하늘 보기 (2006.08.03) : 김윤명



    그래서 그들은 고뇌를 끊지 못한다.
    이 고뇌는 기술적인 스킬이 뛰어나, 동양화와 서양화에 두루 통하고, 오만가지 데생기법과 각종 터치, 컬러링 기법을 줄줄이 꿰고 몸에 익혔다 해도 피할 수 없다.
    그것들은 다만 자신의 허무함을 감출 수 있는 허세로만 작용할 수 있을 뿐, 다양한 기교를 익히는 본연의 의미인 '자신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기교'는 더 이상 아닌 것이다.

    그냥 가만 있어도 허무해 죽겠는데, 즐거운 척 허세를 부리다 보면 아예 공허해 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누가 피에로는 두 배로 슬프다고 했던가.
    그래서 소위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 웃음을 잃고 공허 속에서 아파하고 있는 것 같으면, 나는 정말 가슴이 아프다.

    어사 박문수를 보는 내 가슴은 그래서 찡하다.
     



    김윤명의 탐구생활 2 - cendrillon


    어쩌다 내가 이렇게 돌 맞기 딱 좋은 소리만 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나도 어쩔 수 없다. 즐겁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되려 가슴이 아픈 것을 나 보고 어쩌라고. 짜증나면 안보면 그만 아니냐고 할 지도 모르지만, 그를 그렇게 내 감성을 그냥 한때 스쳐 지나간 작가로 만들어 영원히 '한 물 보내버리기엔' 눈물이 날 정도로 아쉽고 아깝다.

    작가 김윤명의 수단. 즉 그가 즐거움을 표현하기 위해 다져왔던 아름다움의 기술들은 쉽게 보기 어려울 정도로 다채롭고, 다채로운 만큼 화려하다. 비록 좁아터진 화폭 안에서지만 그 안에서 그가 무언가를 위해 바친 노력은 쉽게 볼 수 없는 뛰어난 것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제 다음의 그림을 보라.
    내가 보아온 그의 그림들 가운데, 그의 즐거움이 엿보였던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작품이다.



     

    Cendrillon (2005/08.23) : 김윤명


    난 처음 이 그림의 작은 섬네일 화면을 언뜻 보고 그가 드가의 모사품을 그린 줄로만 알았다. 단순히 자신의 스킬 숙련도를 과시하여 보다 많은 광고주를 영입하기 위해 그린 것인 줄 알았던 거다.

    하지만 클릭해서 크게 열어본 순간, 단박에 생각이 달라졌다. 적어도 내게는 이 그림이 광고 시장에서 얼마나 반응이 좋았는지 따위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
     

    이 그림에서 작가의 붓은 그야말로 아무 생각없이 '놀고' 있다. 왜 놀까? 재미있기 때문이다.
    사위를 뒤덮은 어둠은 어둠이 아니라 날아오르기 위해 신발끈을 동여매는 신데렐라를 돋보이기 위한 장치다. - 동키쇼트가 동키호테인 것처럼, 작품제목인 성들리옹은 신데렐라의 프랑스식 이름이다.

    쏟아지는 광선은 그리 많지 못하지만, 그것들은 화사한 스커트만큼이나 밝은 그녀의 얼굴에 모아지고 있다. 얼굴의 절반은 그늘 속에 살짝 잠겨있지만, 웃는듯 마는듯 신발끈 매는데 집중하고 있는 그녀의 표정은 눈 앞에 다가온 비상을 위한 굳은 의지와 유희를 맞는 설레임에 아롱져 있다.

    난 이 신데렐라의 머리 속을 굳이 들여다 볼 필요도 없었다. 신발끈 졸라매고 무도회 나갈 생각에 정신이 팔려 제대로 대답도 해 주지 않을 테니까.

    오색찬란한 이 스커트의 색상은 한 마디로 작가의 놀이터였다.

    얼핏 보면 붉은 색과 흰색만 쓴 것 같지만, 실제로 작가가 드러낸 색은 녹색과 파란색마저 섞인 다채로움의 향연이다. 이게 여전히 화사한 허세에 불과할까? 그렇지 않다. 여기서 드러난 작가 김윤명의 즐거움을 위한 전위부대들. 즉 수단으로서의 아름다움은 비로소 그 존재를 한껏 만끽하는 중이다.

    가만 둬도 멋진 신데렐라를 왜 가리려 들겠나. 실제로 스커트는 아무리 화사하고 눈에 확 띄이는 색상을 뽐내더라도, 작가가 정작 보여주고 싶어하는 신데렐라의 얼굴보다 눈에 더 들어오지는 못하는 상태다. 꿈에 대한 희망과 그것을 달성하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드디어 그 과실을 따먹기 직전까지 다가온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설레임이 이 성들리옹에는 남김없이 드러나 있다. 그래서 작가는 즐겁고, 완벽하게 '놀' 수 있었던 거다.
     

    *
     

    그런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분명히 이 작가가 어사 박문수, 지옥에서의 계절(une saison en enfer) 연작을 그린 그 작가, 그 김윤명이 맞을까? 이렇게 그림 하나에 인간이 홱 바뀌어버린듯한 느낌을 주는 이유가 무엇일까.

    만약 전작들이 꽉꽉 눌려진, 완전무결한 어둠의 포스를 팍팍 풍기는 하나의 완결된 어둠이었다면 이 작가는 이중인격이라는 말 밖에 안 된다. 하지만 다행히도 다른 작품들은 잃어버린 무언가에 대한 허무와 고통에 힘들어하는 모습이었지, 스스로의 아픔을 독자나 관객에게 전파함으로서 희석해 보려는 악의에 찬 그림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는 원래 이런 사람이지만 전작들을 그리며 돌파구를 찾아 헤메이다가 하나의 힌트로서 그려낸 그림이 이것이라는 말이 된다. 아하.. 아귀가 좀 맞아 떨어지는 느낌.

    모름지기 현재를 살아가는 상업예술가라면, 그림을 그리는 즐거움을 잃어버렸다 해도 어쩔 수 없이 그림을 그려 돈을 벌어야 하며 창작의 즐거움이라는 하위 속성의 즐거움으로 다른 모든 즐거움. 즉 예컨대 밝은 마인드를 대신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이 대신이라는 것은 애초에 불완전할 수 밖에 없으니 완벽을 지향하는 이성의 세계에서라면 아닌 것은 아닌 거고 애초에 틀렸던 것은 뭘 해도 틀려먹은 거라 그게 전혀 쓸모없는 헛짓거리가 되어야 마땅하지만, 불행 중 다행이랄까. 작가들이 노니는 곳은 애초부터 불완전한 인간이 지배하는 감성의 세계다.

    거기서는 인간이 왕이다. 되든 안되든 그렇게 부단히 노력하다보면, 고뇌와 노력은 헛되이 사라지지 않는다.

    한 예술가가 죽어라 노력해서 괴로움을 참아가며 얻은 결과를 보라. 참으로 아름답지 않은가?

    신께서 가라사대, '보시니 좋더라.'
     

    *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날아오르는 것들은 단 하나도 예외없이 빛나는 날개를 자랑한다.
    작가 김윤명의 날개는 그의 다채로운 스킬들이다.

    하지만 날아오를지 아니면 추락할 지를 결정하는 것은 날개가 아니다.
     

     


     

     


     

    illustwriter
    대남

    1998년 보르도 5대학 D.E.F.L.E
    2000년 파리 발라드 오디오 비쥬엘 상급 예술학교(ESRA-Paris Balade)
    2003년 파리 8대학 조형예술학과 Art Plastique, Universite Paris 8e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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