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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윤지의 조심스러운 미스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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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임해영
  • 등록일 : 2015-06-06
  • 조회수 : 12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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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창 시절 나는 정말 산수와 수학이 싫었다. 애초부터 열심히 하지도 않았지만, 커서 어른이 되어 사회에 나가면 진절머리나는 더하기와 빼기부터 미적분과 방정식, 루트셈법 따위는 영영 안녕일 줄 알았다. 그래서 인문계 학과를 지망했고, 수학과는 영영 담을 쌓을 수 있는 길을 열심히 걸었다.

    그렇지만 세상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난 수식과 논리로서 문제를 풀어갈 일은 앞으로 영영 없으리라고 생각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지만 웬걸. 이 수학적인 셈법은 전혀 엉뚱한 방향에서 나타났다. 바로 예술과 감성에서다. 진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200개의 캠벨 수프 깡통 : 앤디 워홀



    산수 공식 가운데 더하기에 해당하는 테크닉은 똑같은 그림의 연속적인 배치로 예술의 무가치성을 입증한 '싸구려 깡통수프 공장장 앤디 워홀'(그 자신이 자신을 이렇게 자처했다)이 만천하에 입증한 방식이다.

    대량생산이 가능한 판화로 '별 것 아닌 수프 깡통'을 연속으로 붙여 드러냄으로서 뭔가 있어 보일 듯한 의문점', 즉 왜 저 따위를 그 대단하시다는 화가께서 저렇게 열심히 그려 놨을까'라는 의문을 관객에게 일으킴과 함께, 연속으로 나열해 붙임으로서 대량생산이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여 '예술 따위는 알고보면 별 것 아니다'라는 본연의 메세지를 드러내는 것. 동시에 세계를 선도하던 미국의 현대 문화는 사실 수프 깡통 따위로도 설명가능하다는 오만과 조롱, 그리고 당대 미국을 휘감아 돌던 냉소주의까지 묘사해 낸 방법이 바로 가장 기본적인 수식인 더하기에서 출발한 거다.

    그러나 산수에 어찌 더하기만 있을까. 빼기도 있다. 거울을 가진 마법사라는 별명으로 불리웠던 앤디 워홀이 지극히 단순한 더하기로 무언가를 나타냈듯이, 빼기 역시 현실에 존재하는 그 무엇에서 이것저것 입맛에 맞게 빼기만 하면 되는 일이니까.

    그런데 이게 어려운 사실은, 덧셈의 마법사라면 앤디 워홀이라는 아주 간단한 증표가 있으니 얼마든지 입증 가능한 데 반해 뺄셈의 마스터는 전무하다는 데에 있다. 예상대로라면 뺄셈 또한 자체적으로 당연히 예술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딱히 제시할 만한 예시적인 본보기도 없는데다가 뺄셈이라는 셈의 법칙 자체가 뽑아내어 비우는 것에 있다보니 선뜻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다. 동양화의 여백 예술조차 여백을 남겨두어야 하는 무언가가 있음으로서 비로소 아름다움이 창출되는 것 아니던가.


    *


    어느 작가던 간에 그가 인간이라면 자신의 작품 세계를 이루는 근간은 필연적으로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이 현실일 수 밖에 없다. 그곳에서 우리는 정보를 얻고, 스트레스와 분노를 배우고, 이상과 감동을 깨우쳐가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오로지 작가들만 거기 모여 사는게 아니라는 사실은 작가가 작품으로서 관객이나 독자에게 메세지를 발산할 때 독자가 수신할 수 있는 확률을 크게 높여주는 하나의 동질감이 된다. 화성인이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예술을 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연유 때문이다.

    빼기의 공식을 적용한 작품을 하나의 메세지로 본다면 그 기본적인 발신체계는 간단하다. 작품세계의 모델이자 이해의 출발점이 되는 이 현실 세상에서 무언가를, 혹은 무언가들을 제거한 채 고의적으로 불완전한 그림을 만들어 관객들에게 드러내는 것이다.

    이를 실행하면 관객들은 그 자리를 채워넣기 위해 스스로 가지고 있는 상상력을 동원하곤 하는데, 이 과정에서 그들에게 상상력을 자극할 의욕이나 재미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필연적인 과정이 된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것 저것 다 빼내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남겨두어 '뭔가 있어 보이는 묘한 느낌의 그림'을 만들어 보여주는 것이 핵심인 것이다.

    이 일부러 무언가를 지워내어 불완전한 모습을 드러내는 기법은 그 사용법 만큼이나 상당히 광범위하게 사용되어 왔는데, 대표적으로는 흑백영화처럼 색채가 사라진 세계, 혹은 거의 복사기를 방불케 할 정도로 오랜 기간 동안 소묘 훈련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묘사에 서툰 사람인 양 어눌하게 그려내어 관객들에게 못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인생의 내공이 있는 듯한 포스를 뽐낸다거나 하는 방식을 말하는 거다.

    이는 현대 순수예술에서는 스테레오 타입에 가까울 정도로 보편적인 기법이지만 상업예술에서도 이를 찾아볼 수 있다. 몇몇 일러스트레이터들은 더하기와 빼기를 적절히 사용하여 자신만의 세계를 쌓아올리고 작품의 성격을 규정짓곤 하는데, 대표적으로 그림자를 지워내어 자신의 세계에 몽환의 느낌을 덧대는 작가들이라거나 현실에서는 보일 수 없는 사물 뒷쪽의 정경을 묘사하기 위해 사물 자체의 형태를 파괴하여 드러냄으로서 더하기와 빼기를 적절히 연결짓는 작가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가하면 그보다 훨씬 단순하게, 일단 이것저것 안가리고 죄다 빼놓은 다음 빈 곳에서부터 시작하는 작가 박윤지와 같은 그림의 방식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무제1 (2008.07.17) : 박윤지



    현실 세계에는 수없이 많은 물질이 존재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물질이란 불가에서 말하는 색(色)의 개념에 가까우며 생각이나 오감 등을 당연히 포함하는 포괄적인 의미이다. 보이든 보이지 않든, 정립된 개념이든 확인되지 않은 망상이든 존재하는 모든 것은 기본적으로 하나의 물질이라는 뜻이다. 문제는 이 세상이 워낙 꽉 짜여져 있기 때문에 이 물질 몇 개 쯤은 슬쩍 빼어내도 별 티가 안난다는 것.

    순수예술가라면 몰라도 상업예술가로서 별 티가 나지 않는 그림을 그리면 배를 곯는 것은 당연지사다. 대중이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찔끔찔끔 빼내면 곤란하니 이왕 뺄 거 화끈하게 좀 표가 날 만한 큰것을 빼어내야 뺀 보람이 있을텐데, 여기서 박윤지가 빼어낸 것은 형태를 제외한 거의 모든 것이었다. 큰 것 몇개만 뽑아낸 것이 아니라, 아예 왕창 들어내 버린 것이다. 자. 어떻게 되었을까.


    *


    셈법에 따라 다를 수도 있지만, 좋은 일러스트레이션 작품에는 세 요소가 필요하다. 하나는 관객 혹은 대중과의 영합. 또 하나는 능력있는 작가나 작품.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광고주. 또는 광고주의 요구 조건 충족이다. 이 세 가지 요소가 적절한 균형을 이루지 않으면 아무리 그림이 좋고 훌륭하더라도 별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해 일러스트레이터는 일거리를 얻지 못해 배를 곯을 수 밖에 없게 된다.

    개인적인 작풍을 일정부분 배치될 수 밖에 없는 광고주의 요구조건과의 사이에서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추어야 하는지는 광고주가 의뢰한 주문에 따라 다르겠지만, 몇몇 경우는 제외하면 대개 반드시 지켜주어야 하는 것은 결코 그림의 시각 장악력이 텍스트의 파괴력을 넘어서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림을 보고 나서 자연스레 텍스트에 눈이 가던지, 아니면 텍스트를 읽고 나서 그림을 보고 내용을 파악하던지 해야 하는 것이 대부분의 일러스트레이션이 가지는 한계다. 이를 초월하여 그림이 너무 튀어버린 나머지 그림에만 뭇 사람들의 시선을 못박아버리면 광고를 발주한 광고주로서는 만족할 리가 없다. 그들은 광고를 하기 위해, 내지는 텍스트의 내용을 보완하기 위해 일러스트레이션 의뢰를 발주한 것이지 결코 작가의 작품전시를 위해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대개의 경우 텍스트와 회화는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조용히 어우러지기 마련이지만, 몇몇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을 수 있는데 이 경우라면 해당 작가가 피카소일 지라도 일러스트레이터로서는 낙제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박윤지의 그림을 보면, 그건 텅 비어있다. 그 안의 모든 것은 대부분 삭제되어 아무런 내용을 읽을 수 없다. 작가는 일부러 그림의 비중을 약화시켜 에너지를 분출시키는 대신 수동적인 위치로 놓음으로서 자신의 작품을 일러스트레이션의 원시적 목적인 '텍스트의 보조자'로서 한정지어 두었다.

    따라서 최소한의 상호보완이 가능할 정도의 형태와 표현만 남겨놓은 그림은 충실한 텍스트의 노예가 되어 광고주의 요구만을 충족하며 철저한 광고미술이 되는 것이다. 관객은 이 경우 아무도 그림을 주목하지 않으며, 또한 주목하지 않기 때문에 불만을 가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과연 그뿐일까. 비어있는 여백은 작가가 남겨놓은 몇 가지 핵심적인 요소와 어우러져 많은 것을 말해 준다.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즉 아직은 비어있고 싶다는 욕망부터, 남겨진 몇가지의 색채. 곧 핵심적인 몇몇 요소와 스스로의 색은 가지고 싶다는 의지다.

    박윤지의 묘사는 뺀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정밀한 데생, 풍부한 색채, 카리스마어린 능동 등 모든 것을 달성한 후 가진 것을 하나하나 지워 뼈대만 남김으로서 작품을 완성해 나갔던 패션 일러스트레이터 르네 그뤼오와는 시작점이 완전히 다르다.

    박윤지의 이러한 '비어있는 그림'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그림들은 80년대부터 2000년대 소녀들의 마음를 강타했던 순정만화에서 마음껏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잡지책에 연재되던 순정만화의 인쇄 특성 상 컬러를 마음껏 사용할 수 없어 스크린톤 작업으로 '땜질'하던 질감묘사는 자연스레 그를 고의적으로 최소화한 몇몇 개폼잡는 주인공 묘사와 함께 그러한 구성에서 필수적이었던 등장인물의 내면묘사까지 낳았다.

    그리고 그 결과물로서 나타난 비어있는 그림체는 내면을 묘사하며 독백하던 순정만화의 드라마식 구성에서 대유행하다가 이제는 흔해진 것들이다.

    그러한 순정만화는 상당부분 독자와의 무언의 약속에 의거하여 그림을 제작한다. 예를 들어 아무것도 색이 입혀지지 않은 머리결은 갈색머리, 거기에 사선이 들어간 머리결은 금발, 까만 색에 광택을 그리면 흔히 보는 머리결 같은 식의, 작가와 독자 사이에 이루어진 상상력 발동조건에 대한 무언의 약속이다.

    이러한 약속은 비슷한 그림체에도 자연스레 이어졌고, 당시의 순정만화를 몇 차례 이상 본 독자라면 이렇게 속이 비어있는 그림체일 경우는 자연스레 내면적인 무언가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일종의 상징법에 의존시킴으로서 비어있되 채워져 있는 그림이 완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관객이라면 어떨까. 이런 그림이 과연 살아나갈 수 있을까?

    물론이다. 비어있는 것은 깔끔하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아무리 단아한 그림을 그린다 해도, 이 비어있는 그림은 흡사 건축물의 실측선도를 연상시킬 정도로 깔끔한 데다가, 어딘가 약간 어눌해 보이는 선을 이용하기 때문에 극히 자연스러운 인간의 냄새를 가지고 있어 그러한 느낌을 소중히 해야 하는 고정적인 광고주가 있는 법이다.



    동양그룹 웹 일러스트 : 박윤지




    주로 금융계(이쪽 업계는 깔끔한 이미지가 생명이다), 자사의 이미지를 깔끔하게 만들고 싶어하는 기업, 삽화의 위치가 너무 직설적이지 않아야 할 소설 등이다. 조금만 그림의 날카롭게 선을 다듬는다면 작가는 신축 건물의 웹 광고같은 것도 노려볼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완전히 그림이 텅텅 빈 것은 아니다. 박윤지 역시 그림에 최소한의 것은 남겨놓았다. 완벽하게 사라진 동세는 형태에 대한 자유를 주었다. 뚜렷한 형태를 가진 인물은 어떠한 자세를 취하더라도 동세를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형태와 함께 남은 것은 형태를 보조하는 색상 한 두개 뿐이지만 워낙 그림이 텅 비어있다 보니 그것은 단지 색의 차원을 넘어 작가 자신의 상태를, 그리고 하고 싶었던 말을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색상으로서 자리잡았다.

    그러하기에 박윤지는 그림 위에 잃어버린 다른 능동적 메세지를 보상받고자 상징적인 형태가 난무시킨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름모꼴부터, 이유를 알 수 없는 입방체까지 자유를 만끽하며 방종으로 치닫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거기까지다. 마름모꼴 입방체에서 도대체 무얼 알아볼 수 있을까. 아직 관객으로서는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다.

    발신된 예술적 메세지는 전문해석이 불가한 상태이기에, 쉽게 말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먹기가 어렵기에 박윤지의 그림은 아직 완성된 수준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작가는 예술가가 되어가는 중이다. 여러가지 시도를 하며 스스로의 갈길을 모색하던 시기를 지나, 이제 서서히 자신을 찾아가며 색채를 그림에 입혀나가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프 깡통만도 못한 타이틀을 명함에 붙이는 것 따위가 그리 중요하던가. 예술가는 모두 일러스트레이터가 될 수 있지만 모든 일러스트레이터가 예술가는 아니라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한가지는 확언할 수 있다.

    박윤지가 이대로 뭔가 스스로 덧붙여갈 수 있을만한 물질 찾기를 신중하게 탐색하다보면, 그리고 그걸 완성하여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메세지가 발신되는 그 때가 오면 나는 작가 박윤지를 예술가 박윤지로 부를 수 있을 것이라는 것. 그게 언제가 될 지는 스스로 노력하기 나름일 테고,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 것은 할 수 없겠지만, 실제로 박윤지의 그림이 무언가로 점차 채워져 나가는 중이란 것은 똑똑히 목도하고 있는 중이니까 하는 말이다.



    무제2 (2010.01.06) : 박윤지



    *


    엄밀히 말하면 앤디 워홀의 덧셈의 미학, 200개의 캠벨 수프깡통조차도 온전히 덧셈만을 사용한 것이 아니다. 이 20세기의 위대한 예술가는 개개의 깡통에서 그림자는 물론이고 판화 특유의 특징을 빌려 질감을 삭제해 버렸고, 색채마저 몇 가지로 제한함으로서 명암을 빼 버렸다. 사진적인 느낌을 빌어 구도를 제외하면서 이러한 뺄셈을 사용하여 총체적인 덧셈의 효과(수프깡통의 연속적 노출)을 극대화했다.

    앤디 워홀의 예에서 보듯 뺄셈의 미술을 하겠다고 뭐든지 빼는건 장땡이 아니다. 지능적으로 덧셈을 붙여 뺄셈을 극대화하는 것. 즉 박윤지처럼 전부 일단 빼어버린 후 덧붙여나갈 수 있는 요소를 찾아가는 것도 훌륭한 방법이다.

     

     

     

     


     

    illustwriter
    대남

    1998년 보르도 5대학 D.E.F.L.E
    2000년 파리 발라드 오디오 비쥬엘 상급 예술학교(ESRA-Paris Balade)
    2003년 파리 8대학 조형예술학과 Art Plastique, Universite Paris 8e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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