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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람 너머로부터의 속삭임 천은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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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임해영
  • 등록일 : 2015-06-05
  • 조회수 : 2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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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람 너머로부터의 속삭임 천은실 1


    일러스트레이터들의 그림들을 여러 편 구경하다 보면 그 세계들을 크게 둘로 가를 수 있다.
    하나는 빨려 들어가 살고 싶은 세계. 나머지 하나는 그냥 보는 것만으로 족한 세계.

    이 차이는 그림을 잘 그리고 못 그리고, 자신을 나타내고 못나타내고로 갈리는 차이가 아니다. 인세에 보기 드문 거장이라도, 아무리 완전하게 구성된 멋진 세계라 할 지라도 그 세계가 '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당연히 나는 거기 들어가 살기 싫은 것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이는 순전히 주관적인 기준이다.

    그런데 몇몇 작가들은 놀랍게도 거의 일반적으로 '누구나 들어가 살고 싶은 보편적인 세계'를 가지고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단지 현실세계에 불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이상향을 꿈꾸는게 인간의 마음이라서?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선 다음의 그림을 보자



    고래 (2005.03.07) : 천은실



    고래 여러 마리가 깊은 바닷속을 헤엄치고 있다.군데군데 새장들이 드리워져 있는데, 이 이것들은 고래의 움직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설령 영향을 미친다 한들 고래를 잡기엔 턱없이 부족한 크기이기에 그런 것일까. 그것이 일상적인 모습인 양 헤엄치는 고래들은 새장에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일정한 방향으로 항진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앞에 거대한 위협이 있는지 아니면 미지의 신천지가 기다리고 있는지는 전혀 드러나 있지 않지만, 눈동자에 나타난 감정 또한 지극히 고요한 상태임을 보아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 역시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조용한 정적만이 지배하는 세계. 배의 기적 소리를 방불케 하는 고래의 울음이 긴 여운을 남기며 잦아드는 것이 아주 당연하게 느껴질 것 같은 평온의 세계.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게 어딘가 아련하다는 거다.

    작가 천은실의 세계가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이상향이라면 당연히 신비감이나 동경을 풍길 뿐 아련함을 풍길 수는 없다. 그런데 왠지 전혀 거부감이나 이질감이 전혀 들지 않을 뿐더러 심지어 엄청나게 오랜 세월 전에 최소한 한 번씩은 겪어본 느낌이 드는 것이다. 왜일까?

    조금만 생각해 보면 금세 답이 나온다. 사실 우리는 누구나 이런 세상을 누구나 한 번씩 실제로 경험했었으니까. 기억하는 사람은 하나 없어도 최면만 걸리면 다들 줄줄이 읊어대는 그 곳. 바로 어머니의 뱃속이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유유히 유영하는 느낌. 바깥세상의 소리를 어머니를 통해 전해 듣는 안정감. 그 안에서 무슨 짓을 하던 절대 세계는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확고한 믿음. 이것이야말로 작가 천은실의 작품이 가지는 힘의 모습이다.

    이건 아스라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기억 너머의 무의식이 지배하는 절대적 안온의 공간이었다. 작가 천은실은 부드러운 손놀림으로 그것을 보듬어 안았고, 그러하기에 우리는 이 작가가 어머니를 그리지 않았더라도 어머니를 만날 수 있다.

    바윗돌에서 태어났다는 손오공마저도 어머니 격인 바윗돌이 있었으니 그 어떤 경우에라도 예외는 있을 수 없다. 사모곡에 가까운 이 그림을 보고도 어딘가 아련해 지지 못하는 것이 더 어려운 거다. 그렇게 누구나 가질 수 밖에 없고 알고 있을 수 밖에 없는 근원에 가까운 세계를 포착한 천은실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보편성을 찾아내었고, 그것을 자신의 세계수(世界樹)로 삼았다.


    *


    작품을 판매하여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작품을 재생산하는 것은 순수미술가나 상업미술가나 동일하지만, 상업미술과 순수미술을 가르는 중대한 차이점의 하나는 이른바 이 보편성의 중시에 있다.

    상업예술가, 특히 일러스트레이터들에게 있어 이 보편성은 생명과도 다름없다. 제 아무리 인간의 내부를 파고드는 멋진 그림을 그려 보아야, 너무나도 그 의미가 깊고 다양한 나머지 고작 소수에 불과한 관객의 이목만을 끌 수 있다면 일러스트레이터로서는 당연히 낙제다.

    일러스트레이터가 찾아야 하는 인간의 본성이란 기본적으로 보편성을 전제삼아야 한다. 바로 여기에 고민이 있다. 일러스트레이터는 일반적인 인간의 공통되는 특징. 즉 인간의 본질을 찾아내어야 하는데, 막상 세상 어디를 찾아봐도 이 '보통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작가 천은실은 이 모순을 기억 너머에 숨겨져 있던 무의식 근처에 다가감으로서 해결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 혹은 누구나 가지고 싶어 하는 것. 누구나 그리워하는 것이나 혹은 누구나 두려워 하는 것 등, 보편성이 가질 수 있는 여러 주제들 가운데 안전하고도 확실한 것. 즉 어머니의 태내에 대한 그리움에 착상한 것이다.

    작가는 무엇이든 그릴 수 있지만, 관객은 그것들 가운데 자신들의 마음에 드는 것만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손자병법에서도 일렀듯이 유능한 장수는 승산없는 싸움을 피한다 하였는데, 그건 유능한 예술가도 마찬가지. 그들은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을 그려 보여주곤 하는 것이다.


    *


    임종을 앞 둔 스승 성창이 마지막 가르침으로 입을 크게 벌리며 제자에게 물었다.

    ' 내 입 안에 무엇이 보이느냐? '

    제자가 답했다.

    ' 혀가 보입니다. '
    ' 이는 보이지 않느냐? '
    ' 스승님. 치아는 다 빠지셨습니다. '

    성창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 치아는 단단하기에 종내 모두 빠지는 법이지만 혀는 부드럽기에 남는 것이다. '

    스승은 임종했고, 제자는 남았다. 이 제자가 바로 노자다. 그리고 이러한 스승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긴 노자는 그럴싸한 말을 하나 남겼는데, 이 말이 얼마나 멋졌던지 무협소설을 들고 날밤을 홀랑 지새우던 내 고등학교 시절을 통째로 지배해 버렸다.


    ' 부드러움은 능히 강함을 제압할 수 있다 (柔能制剛) '


    슬램덩크 식으로 말하자면 리바운드를 제압하는 자가 게임을 제압한다는 논리지만, 사실 그건 삼천년 전의 병법서에 기입되어 있던 이 유능제강의 농구식 벤치마킹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가진 거라곤 쥐뿔도 없던 까까머리 고등학생은 노자 할아버지의 말에 깜빡 넘어갔다. 부드러운게 제일 세고, 쉬운 줄 알았던 거다.

    하지만 알고보니 이 할아버지는 여러 사람 신세 망친 무서운 사람이었다.


    *


    아무리 차가운 것일 지라도 받아들이는 주관에 따라서 얼마든지 따스하게 느낄 수도 있는 법이니 원효대사는 이를 일러 개인의 주관과 감성에 따라 시체에 고인 썩은물과 천상의 감로수를 가름짓는 일체유심조라 불렀다.

    차가운 색이라 불리우는 푸른 색에도 따스함을 찾아낼 수 있고, 정열과 분출의 빨간 색 역시 작가가 사용하기에 따라 능히 수줍운 소심함을 입힐 수 있다. 작가 자신의 세계가 확실하다면, 이렇게 색상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느낌이란 것은 한갓 허상에 지나지 않으며,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오히려 여러 겹의 다중적인 느낌을 가져올 수도 있는 것이다. 다음의 그림을 보자.



    시월에 눈내리는 마을 포스터(2004.09.14) : 천은실



    포근하게 쌓인 눈이 마을을 덮고 있고, 한편에서는 하얀 고양이가 마을 한 가운데에서 피어날 준비를 하는 꽃봉오리를 보고 있다. 겨울에 돋아난 꽃봉오리가 이질적이거나 위태로와 보이지 않고 되려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는 것은 오로지 작가의 주관이 이 세계에 쌓아올린 부드러운 힘 덕분이다.

    사방을 감싸고 있는 저 서늘한 푸르름은 작가가 보호하고 있는 부드러운 꽃봉오리를 범접할 수 없다. 심지어 저 서늘함은 오히려 작가의 부드러운 세계를 돋보이게 하는 장치에 불과할 뿐, 어차피 한 겨울에 꽃이 피어나더라도 다치지 않도록 헌신해 줄 텐데 뭐가 이상해 보이겠는가.

    언뜻 보기에 이런 부드러운 그림은 따라그리기가 마냥 쉬워 보인다. 사춘기의 여학생이 보기에 부드러운 어머니는 항상 어리석어 보이듯, 이런 그림의 모사는 어려울 리가 없어 보인다. 그냥 색상의 지나친 대비를 피하고, 그라데이션과 콘트라스트를 부드럽게 맞추어 가면서 묘사를 간략화하여 쓱쓱 그리면 다 될 것 같다.

    물론 그렇게 해도 가능하긴 하다. 불을 뿜는 화산과도 같은 작가의 격렬한 심성 표출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지 않기에, 그림을 배우는 입장에서라면 한 두 작품 모사해 보기 알맞은 그림이 이런 것이다.

    대체적으로 처음 그림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작품은 이렇게 부드러운 방식을 취하기 쉽다. 극단적인 색상 대비, 분출하는 자신의 욕망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그림을 망칠 수 있다는 소심함 때문에 그들은 본능적으로 옅은 색상, 간편한 묘사를 선호한다.

    하지만 몇 년, 혹은 그 이상의 기간동안 자신의 작품세계를 이렇게 안온하게 가져갈 수 있을까? 그건 아니다. 어느 정도 그림을 그려봤다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삼는 순간 이 그림의 난이도는 절벽처럼 상승한다.

    이 난이도 상승의 원인은 부드러운 속성을 가진 천은실 작가의 그림 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마음은 이미 콩밭에 가 있어 격렬한 그림을 그리고 싶은 사람이 이런 것을 따라하다 보면 손가락이 근질거리기 마련이고 뭔가 쇼킹하고도 화끈한 것, 튀는 것을 그리고 싶어 안달나기 십상이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달을 참아가며 부드러움를 계속 묘사하려 할 경우는 어떻게 될까. 사춘기 여중생이 아무리 예쁘게 어머니 립스틱을 칠하고 왔다 한들 우스꽝스런 모습이 되어 나이트클럽의 입장을 거부당하기 마련이듯이 그림 역시 마찬가지다. 부드럽지도, 강렬하지도 못한 어정쩡한 그림이 되어 일그러져 버리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엉망이 되어버린 그림. 즉 헝클어진 자신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괴로와 하다 방황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우쭐거리고, 뭔가 유별나 보이고 싶어하는 욕망은 인간의 본성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이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그것을 억누를 수 있는 능력. 즉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마음같이 어이없을 만큼 착한, 혹은 선하고 싶어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은 권력을 쥐고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 일이라고 했다. 그게 바로 노자가 말하는 정치의 상위 테크닉, 무위(無爲)의 치(治)다.

    작가는 화폭 안에서는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있는 신적인 존재지만, 그 권력으로 자신의 작품 세계에 있는 모든 것. 즉 자신의 자식들에게 오직 잔잔한 평화를 가져오려 헌신할 뿐 격렬한 폭동이나 뼈와 살이 튀기는 전쟁터는 절대 만들지 않는다. 물론 작가 천은실도 일러스트레이터인지라, 가끔 광고주의 요구나 드라마의 내용에 따라 부드러움만으로는 그 표현에 한계가 있는 그림을 묘사하기도 한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할까? 다음의 그림을 보자.



    서커스 단장 - 피노키오 연작 (2008.10.15) : 천은실



    이 그림이 바로 내가 작가 천은실의 세계에서 능동적인 부분을 발견했던 몇 되지 않는 그림들 가운데 하나이다. 물은 절대 스스로 흐르지 않듯이, 능동은 부드러움의 영역이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부드러운 어머니라도 자식들에게 무서운 것, 즉 '에비~'에 대해 설명은 해 주어야 하는 법. 벌써 서커스 단장은 어딘가 다른 피노키오 연작들들에 비해 눈에 띄는 이질감이 흐르고 있다.

    그러나 그것도 여기까지였다. 피노키오는 서커스 단장을 떠나 다시 부드러움의 세계로 돌아가 버렸고, 이후 등장하는 다른 피노키오의 일러스트들에서는 이질감이 사라져 버렸다.

    이것이 에비..의 상징. 예컨대 능동적이고 공격적인 서커스 단장을 묘사해야 했던 작가가 스스로의 세계 속에서 2008년 당시 용인해 줄 수 있었던 역동의 한계점이다. 그리고 완벽한 제어를 통해 자신의 세계의 한계를 규정지음으로서 그것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렇게 한계점을 스스로 규정짓고 자신의 세계를 완벽하게 제어하는 능력이야말로 예술가가 가져야 할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능력인 것이다. 스스로의 세계관이 확실하여 작품의 퀄리티를 일정하게 유지한다는 평가는 해당 예술가의 기본기가 비길데 없이 단단하다는 말이 된다.

    일러스트레이터의 기본기는 데생, 구도, 색채 선택과 같은 테크닉적 기본기와 광고주의 요구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레이아웃 작법, 직관력과 이해력 등이 요구된다. 하지만 예술가의 기본기는 거기에 하나가 더 따라붙는다. 바로 자신의 세계를 구성하고 그것을 장악하며 그 테두리를 벗어나는 모든 것을 제거할 수 있는 과단성이다. 작가 천은실의 작품에는 이 모든 것들이 화강암처럼 단단히 어우러져 있다.

    여기서 마지막으로 한번 더 묻겠는데, 아직도 이런 것들이 쉬워 보이는가?


    *


    부드러움은 강함보다 훨씬 어렵기 때문에, 능히 굳강함을 누를 수 있다. 하지만 그 어려운 것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화려한 잔재주보다는 강력한 기본기가 훨씬 더 중요하다.

    유능제강이라. 말은 멋지다. 하지만 노자 어르신께서 빼먹으신게 있는데 그것은 이러한, 강함에 맞서 밀리지 않을 정도의 부드러움을 쌓는 것이 절대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 즉 애들은 따라하지 말라는 주의사항이다. 노자께서 그걸 몰랐을 리가 만무하다.

    알면서 말을 안 한 것이다. 그리고 그걸 몰랐던 얼치기 고등학생은 학창시절 내내 지극히 부드럽게 지냈고, 그만큼 엄청 많이 맞고 다녔다. 그래서 나는 이제 말할 수 있다.

    노자 미워!


    요람 너머로부터의 속삭임 천은실 2

    200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는 배부른 자들의 말로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상황에 만족한 나머지 지지하던 후보에게 투표하지 않고, '사냥과 낚시질 연합' 같은 웬 반쯤 장난스러운 정당에 표를 던져버리거나 선거날 투표 따위 걷어 치우고 가족끼리 놀러가 버린 것이다. 그 결과는?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프랑스 헌정 사상 최악의 부패정치인으로 욕을 먹던 당대 대통령과, 로마 시대 이후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옹고집 파시스트가 결선투표로 올라가 버린 것이다. 프랑스의 진보와 자유, 인권을 위해 분골쇄신하던 진보정당의 당수는 한 순간에 바보가 되어 버렸고, 프랑스 국민에 대한 배신감과 인간적인 쓰라림에 상처받아 영원히 정계를 은퇴했다.

    그는 이제 자유와 인권에 대해 신경을 쓰는 일 따위 일절 집어치우고 대신 사냥과 낚시질에 정열을 불태우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인간이 만족하는 순간, 진보는 외면당하고 만다.


    *


    예술가라고 부르면 뭔가 거창해 보이지만, 실상을 보면 별로 다를 것 없다. 예술가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 단단한 작품 세계는 예술 활동에 있어 매우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잊지 말아야 할 점은 바로 그 세계 안에 안주하여 정체되며 만족만 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창작의 고통 어쩌고, 고뇌하는 예술가 어쩌고 하는 뭔가 삘이 올 것만 같은 멋진 이야기들은 분명히 근사해 보이지만, 거기엔 빠질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목적이다. 그 목적에 대한 추구. 즉 진보야말로 언제나 더 큰 아름다움을 찾아 움직여야만 하는 감성의 방랑자들인 예술가들의 활동의 근본적인 이유이기 때문이다.

    보다 큰 아름다움을 위해 발전을, 발전을 위한 변화를, 변화를 위한 노력을. 그리고 그게 쉽지 않기에 자연스레 수반되는 고통은 그 자체로서 예술가의 처절한 고뇌의 기록이 되고, 그럼으로서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 아니던가.

    예술가가 갖추어야 하는 자신의 세계 장악력은 분명히 매우 중요하고, 그만큼 단단히 다져진 기본기에 대한 지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기본기 역시 어디까지나 아름다움을 찾기 위한 하나의 수단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더 크게 보면 아름다움 역시 즐거움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인데, 그 절대명제인 즐거움을 위한 수단도 아닌 '수단을 위한 수단'에 사로잡혀 버린 채 그 안에 안주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안타깝기 짝이 없다.

    화려한 스킬도 수단이 될 수 있고, 다양한 색채 구성도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다. 부드러운 형태 묘사도, 단단하게 여물린 작품 세계도, 심지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조차도 즐거움을 맛보기 위한 아름다움의 성취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다음의 그림을 보자.



    벽 (2005.09.21) : 천은실



    작가 천은실의 온건한 작품세계는 비길데 없이 단단하다. 이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것의 고유한 존재가치를 상실한다. 작가가 휘두르는 무소불위의 힘에 묘사당함으로서 스스로의 고유 형질과 전혀 관계없는, 즉 따뜻하고도 평안한 작가의 세계에 어울림 당해 버리기 때문이다. 지진과 같은 천재지변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핵폭발이나 빅뱅 현상같은 극단적인 능동 표출마저도 이를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작가가 자신의 세계를 위협할 수 있는 능동과 역동을 주의해야 할 요소들로 규정하고 행동의 자유를 허용 한계점 안으로 제약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비길데 없이 단단한 이 기준에 벗어나는 것들을 작가는 모조리 삭제하고, 무시하고, 다듬어 내어 기어코 자신의 기준에 맞춰 버린다.

    이렇게 예술가가 지배하는 현재의 작품세계는 그 자체로써 작품을 거듭할 때마다 점점 완전에 다가간다. 하지만 완전에 가깝다고 해서 전혀 문제가 없을까? 물론 그건 아니다. 뭔가 문제가 없다면 작가는 이렇게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리는게 아니라 벌써 서방정토로 해탈했을 테니까.

    그 문제는 작품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외적인 요소. 즉 현재라는 시간에 있다. 작가는 미래를 향해 나이를 먹어가는데, 그의 작품세계는 스스로의 완전함을 부여잡고 지키기 위해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스스로 닫아버린 그 한계의 기준은 마치 신사임당 화조도의 고요한 세계를 보는 듯 정제되어 종이 반 장 들어갈 틈 없이 맞물려 있고, 스스로 그어버린 한계를 본인의 의지 없이는 절대 넘지 않는다.

    비어있는 저 거대한 면을 무리없이 처리한 솜씨나, 당연히 무거움을 느껴 불안정해져 버린 구도를 아예 순리에 맞추어 비스듬히 기울여 버림으로서 얻어낸 자연스러움은 나무랄 곳 하나 없이 훌륭하다. 자기 키의 열배는 넘어보일 듯한 꽃을 들고 있는 소녀도, 그 옆에 있는 하얀 고양이도 수줍게 뚫려있는 벽의 작은 구멍을 위로하듯 서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그림 전체에 이미 위협이란 단 한 점도 존재하지 않는다. 관객은 자연스레 이 안에서 온기를 느끼고, 그 안에서 안주하고 싶어하게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러한 작품 세계는 그 완전성과, 스스로에 대한 깊은 성찰로서 얻어낸 지독한 보수성에 덜미를 잡혀버린 상태다. 비단 이것만이 아니다. 지난 5년동안, 작가의 그림은 눈에 띄일 만큼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어쩌다 변화를 꿈꿀 수 있는 요인도 작가의 기준치에서 벗어나는 순간 거세되듯 순화되어 버리고 마는 상태로, 점점 더 닫혀진 완벽을 향해 나아갔을 뿐이다.



    약속 (2009.05.28) : 천은실



    사람이란 것이 완벽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무심코 작업을 진행하다 보면 가끔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 변화의 조그만 씨앗이기 마련인데 그마저 철저히 삭제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는 작가가 의도적으로 변화를 거부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하긴 어머니가 변한다면 그게 더 황당한 노릇인지라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해서 그 자리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기엔 이 작가의 막강한 제어 능력이 많이 아쉽게 느껴진다.


    *


    대통령 선거에서 울며 겨자먹기로 부패정치인을 당선시켜야 했던 프랑스인들은 깊이 참회했다. 투표를 집어치우고 그 시간에 산과 들로 놀러나갔던 젊은이들은 스스로의 티셔츠에 '나는 내가 프랑스인인 것이 창피합니다(J'ai honte d'etre le francais)'라고 인쇄하여 입고 다녔고, 진보정당은 진보정당 대로 유능한 리더를 잃어버리는 치명상를 입어 아직까지 빌빌대는 중이다.

    이른바 '부르조아지가 단결'하지 못하고 진보를 거부한 셈인데, 예술가는 적어도 자신의 세계에서는 철저하게 보수적이어야 하지만 또한 진보의 씨앗을 애지중지할 줄 아는 기막힌 밸런스 테크닉을 가져야 하는게 아닐까.

    정치는 사실 어려운 거다. 거기가 현실이던, 자신의 내면이던 간에.

     

     

     

     


     

    illustwriter
    대남

    1998년 보르도 5대학 D.E.F.L.E
    2000년 파리 발라드 오디오 비쥬엘 상급 예술학교(ESRA-Paris Balade)
    2003년 파리 8대학 조형예술학과 Art Plastique, Universite Paris 8e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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